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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원장의 1% 가능성과 99%의 노력으로 도전하는 성공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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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07-10-16 17:58 조회2,69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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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아이디어와 기술, 신뢰로 승부합니다



      ‘1%의 가능성과 99%의 노력으로 도전합니다’


                                  신경숙 유림교역 사장



  한․중 수교가 이뤄지기 전인 지난 92년 중국의 서대유 대표를 단장으로 하는 15명의 중국 민간사절단이 한국을 방문했다. 정식으로 국가 간 수교를 맺기 전 먼저 수교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상호이익을 점검해보는 의미의 방문이었다. 난 이 민간사절단의 유일한 여성이자 조선족 동포로 한국에 첫 방문을 했다. 당시 베이징경영과학기술유한공사 행정 직원이던 나는 중국어와 일어는 물론 능통한 한국어 실력으로 한국의 정계, 재계 대표들과 사절단이 가진 대담에 통역역할을 수행했었다. 약 6개월 동안 한국을 대표하는 각계 인사들과 접촉하며 한국의 이모저모를 살펴볼 기회를 가졌다.

 나는 처음 한국 땅을 밟았던 그 날의 느낌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사절단의 통역 수행을 하느라 늘 바빴지만 한국을 제대로 보기 위해 이곳저곳 열심이 다녔다. 그 즈음 내게 한국은 ‘깨끗하고 살기 좋은 나라’라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당시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은 중국과 매우 달랐다. 단기간에 놀랄만한 발전을 이룬 한국의 모습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나는 중국으로 돌아가자마자 한국화약의 중국지사 설립에 참여하며 한국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북경에 설립된 한국화학진흥주식회사는 중국에 진출한 첫 한국회사였다. 당시 내가 수행한 업무는 중국에서 생산되는 화약제품의 독점계약을 체결하고 이를 한국으로 수출하는 일이었다. 나는 한국 공장에서 사용할 원재료를 공급하고, 생산에 차질이 없도록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 전역을 다니며 원료공급지와 생산지를 찾아다녔다. 한국으로 공급된 물량은 당시 대기업인 종합상사를 비롯해 대부분 한국의 화학기업에서 전량 공급되었다.

  이때 내가 히트시킨 화학제품이 두 가지 있다. 하이타이의 원료인 무수망초와 염화칼슘이다. 품질이 우수한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과 독점 계약해 한국에 공급한 무수망초는 년 간 12,000톤 까지 수출하기도 했다. 제설용 염화칼슘은 중국내 공장 3개를 확보, 연간 10만 톤  가량 수출했다. 중국지사에서 내가 할 일은 가격경쟁력을 지난 좋은 품질의 화학원료를 안정적으로 수급하여 정해진 시기에 차질 없이 수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당시 초화면, 멜라민, 소다혜, 가성소다와 같은 15가지의 원재료를 수출했다.

  

            북경버마이무역회사 설립, 화학관련 제품 수출입 업무 진행


  한국회사의 중국지사에서 수출업무를 하면서 중국의 화학공장과 한국 기업들에 대한 인맥을 넓힌 나는 97년 중국에 북경버마이무역회사를 설립했다. 첫 거래품목은 대만 포모사 그룹에서 생산하는 비스코스레이온을 한국에서 공급하는 일이었다. 대만 포모사 그룹으로부터 레이온섬유의 한국 내 독점판매권을 확보한 나는 한국에 들어와 공급업체를 찾았다.

  기존의 거래가 없었던 나는 직접 영업을 해야 했다. 한국 회사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던 나는 많은 물량을 거래할 수 있는 대기업과의 거래를 위해 먼저 114에 전화해 대한방직 전화번호 알아냈다. 그리고 대한방직으로 찾아가 대만산 레이온섬유를 공급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한방직은 레이온섬유는 쓰지 않고 코튼만 쓴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제일 큰 섬유기업과 거래하면 동종업계 기업들과 수월하게 거래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나는 막무가내 한국에서 영업을 시작했던 것이다.

  비록 대한방직과의 거래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 인연으로 대한방직에서 한국의 레이온섬유 사용업체를 소개받아 대만의 레이온섬유를 한국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먼저 콘테이너로 대만의 레이온섬유를 사와 한국 기업들과 거래를 시작했다. 이 후 연간 8000톤 가량의 대만의 레이온 섬유를 한국의 경방, 대농, 방림방직, 충남방직 등 70여개 업체에게 공급했다.

  그 후 한국 내 독점판매권을 확보해 많은 물량을 수출함으로써 대만 포모사 그룹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98년 대만 포모사 그룹의 아시아 대리점 권을 확보했다. 또 포모사 그룹에서 생산하는 레이온섬유를 일본,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으로 연간 2만3천 톤 가량 수출하는 실적을 올리기도 했다.

  기존 거래처와 신뢰기반을 굳히기 위해 내 나름대로 애를 많이 썼다. 고객이 문제가 생기면 즉각적인 대처를 하며 거래기업과의 신뢰관계를 구축해 거래품목을 넓혀가는 방법으로 회사의 성장기반을 다져갔다. 기존품목을 취급하기 위해 각국을 오가면서 거래기업이 필요로 하는 소재를 파악하고 이를 다양한 경로로 확보해 다시 공급하는 형식으로 무역규모를 지속적으로 넓혀갔다.

 처음 창업했을 때 포모사 그룹의 담당자가 ‘무역업에서는 아이템은 몰라도 거래방법만 알면 된다’고 했던 말대로 나의 사업영역을 넓혀갔다. 물론 기업마다 기존의 품목을 거래하는 선이 이미 확보되어 있다. 그러나 오랜 기간 거래하며 신뢰관계를 확보해 놓은 데다 나의 친화력과 대응력으로 쉽게 기존고객들의 다양한 품목 거래정보도 확보했다.

 그런 방법으로 중국과 대만에서 생산되는 원재료를 일본이나 한국 등으로 수출하고 반대로 한국에서 생산되는 완제품을 다시 중국과 아시아 각국으로 수출하는 일종의 바터식 무역을 하고 있다. 현재 유림교역에서는 한국 한일그룹의 아크릴섬유, 세원과 효성의 나이롱파이버, 삼양사와 SK의 폴리에스테르 등을 중국과 동남아 각국으로 월 8000톤 가량 수출하고 있다.


               ‘1%의 가능성과 99%의 노력’


  지난 2000년 서울 여의도에 유림교역을 설립한 나는 사무실이 있는 여의도에 거주하며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을 오가며 무역 업무를 진행하고 있다. 한국에서 거래하는 기업들이 많기도 하거니와 한국에서 더 많은 비즈니스 기회를 확보하고자 내가 선택한 방식이다. 한국은 중국보다 자본주의를 먼저 실시했기 때문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이런 배움을 토대로 향후에 중국에서 더 큰 꿈을 펼칠 계획도 가지고 있다.

  나는 매일 새벽 4시에 잠에서 깨어난다. 매일 새벽 일어나자마자 세계의 일일 석유화학제품 시세를 파악하는 것이 나의 하루 시작이다. 무역업은 품질이 우수하고 가격 면에서 최소한 5%의 우위가 있어야 신규거래를 확보할 수 있다. 지금 모르는 품목이라도 앞으로 취급하려면 무엇보다 품목에 대한 많은 정보가 축적되어야한다.

  일단 거래기회를 얻게 되면 처음 6개월 동안은 커미션을 포기할 정도로 이익을 보지 않고 좋은 조건으로 거래를 한다. 설사 거래 중 원재료 가격이 오르는 일이 있어도 계약가격대로 공급을 책임지면 고객과의 신뢰관계는 더욱 확실해 지게 된다. 이러한 점을 여러 업체들과 거래하면서 새삼스럽게 확인했다.

  내가 조금 손해 본다고 생각하면서 일하면 후에 더 크게 얻는 것 같다. 이제 고객들은 중국과 신규 프로젝트를 계획하거나 다른 일이 있을 때에도 나에게 먼저 상의를 할 정도로 나를 믿고 일을 맡긴다.

  현재 유림교역은 한국 업체와 화학섬유관련 원재료 30%, 정밀화공약품 30%, 부직포원단 30%, 방직기계 5%, 편직기계 3% 등의 비중으로 수출입 업무를 진행하고 있다. 페인트원료를 비롯,  PG, MMA, PTA, EC, CAC, EG, ABS, PD 등 약 50여 종류의 석유화학 제품을 중국에서 수입해 국내 전자관련 대기업과 중소기업에 공급하고 있다.

  이와 함께 한국에서 생산되는 윤활유를 중국에 수출하고 중국에서 생산되는 베이스오일을 역으로 한국에서 공급하고 있기도 하다. 나는 모든 비즈니스의 원칙을 무역업의 기준에서 판단한다. 품질과 가격의 우위가 있으면 서로 필요로 하는 곳에 연결해서 시장이 이뤄지도록 하는 것이 무역업을 운영하는 사람의 원칙이다. 그 품목이 원재료가 되었던 완제품이 되었던 관계는 없다.

  중국에서 시작하여 한국으로 비즈니스 범위를 넓히고 이제는 세계 각국의 기업들과 무역거래를 하고 있는 나의 비즈니스 철학은 간단하지만 치열하다. 나는 일단 1%의 가능성만 있으면 99% 노력으로 성사시킨다. 남들이 볼 때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낮은 확률게임을 성사시켰을 때 얻는 성취감은 그 무엇과는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


                  배움과 교류 속에 터득한 인생의 가치


  2006년부터 나는 중앙대 산업경영대학원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시작했다. 매주 목요일은 하루 종일 학교에서 강의를 듣고 공부를 하면서 내가 필요한 분야의 지식을 얻고 전문가의 자격을 취득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지난 2000년 한국에 이주해 국내 각 대학의 최고경영자 과정에서 공부하며 첨단 지식을 습득하고 다양한 분야의 전문인들과 폭넓은 교류관계를 얻었다. 2005년에는 부동산관련 석사과정을 마치기도 했다. 한국과 중국을 오가는 가운데 수많은 품목의 수출․수입 업무를 직접 진행하면서도 나의 배움에 대한 열의는 계속 되었다.

  나는 살아 움직이는 한 하나라도 더 배우고 또 배운 것을 실천해나가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이라고 여긴다. 몇 년 전 우연히 라디오 방송에서 여성경제인협회에 대한 뉴스를 접하고 그날로 회원 가입을 하였고 현재 서울지회 창업분과위원장을 맡아 월별 모임을 주관하고 있다. 모임 전 회원들에게 10여 차례 문자메시지를 날려 모임에 대한 인지도를 높이며 회원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가운데 유익한 모임을 만들어 가고 있다. 여성경제인협회에 대한 나의 관심과 애정은 각별하다. 그런 애정이 있기 때문에 2006년 서울에서 주최한 세계여성대회에 중국여성기업인들이 올 수 있도록 가교역할을 하기도 했다. 앞으로도 내가 가진 인맥과 노하우를 활용해 비즈니스든 민간교류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하고 싶다.

 

  최근 나는 여의도에서 무역업 외에 새로운 사업에 도전장을 냈다. 지난 6월  여의도 진주상가 빌딩 5층에 신경숙어학원의 문을 열었다. 한국은 물론 중국에서 20년간 중국어 강의 경험을 토대로 중국어 강의법을 직접 개발했다. 내가 개발한 강의법이 가져올 결과에 대한 확신을 기반으로 한국인들에게 최적의 중국어 강의를 실시할 계획이다. 학원 설립 전에 한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학원과 그렇게 못한 학원 수 십 군데를 가보고 나름대로 학원 운영에 관한 노하우를 터득했다.

  이른 아침부터 학원에 나가 직접 강의와 상담을 하며 요즘 새로이 시작한 사업에 나의 열정을 쏟고 있다. 나는 1%의 가능성을 보고 99%의 성공을 기대하며 지금껏 살아왔다. 가능성이 희박한지 많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다른 여성경제인에게도 단 1%라도 가능성이 보인다면 도전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만약 실패를 하더라도 도전하고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배우는 것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내 신념을 믿고 내 인생의 꿈을 성취하기 위한 삶의 여정을 서울 하늘 아래서 계속하고 있다. 신경숙 어학원을 무대로 앞으로 한국에서 어학은 물론 문화, 역사, 생활풍습 등 중국에 관한 모든 것을 전달할 수 있는 중국전문학교 건립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10년 전 한국에 처음 와서 사업을 시작했을 때처럼 이제 또 다른 계획을 세우고 서울에서 서울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꿈을 위해 달려가고 있다. 1%의 가능성을 보고 99%의 노력을 기울이는 내 삶이 무대에서 말이다